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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13-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지상명령을 잇는 다섯 고리

지상명령은 흔히 "가라"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그 명령을 한 걸음 더 뒤로 밀고 갑니다. 가는 사람이 있으려면 보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네 개의 되묻는 질문을 쌓아 올려 구원에서 파송까지를 하나의 사슬로 묶고, 그 사슬의 맨 끝 고리에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로마서 10:15, 개역한글).

이 글의 성경 직접 인용은 모두 개역한글판(1961, 공개도메인)입니다. 개역개정·새번역은 대한성서공회의 저작권 보호를 받으므로 직접 인용하지 않고 절 번호만 표기했습니다. 본문 대조는 대한성서공회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칼과 서신을 든 사도 바울을 그린 엘 그레코의 회화
사도 바울 — 로마서 10:15에서 "보내심"을 말한 사람이며, 그 자신이 보내심을 받아 살았던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림: El Greco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본문 — 로마서 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0:13-15,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 1961)

이 대목은 로마서 9~11장, 곧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을 위해 애태우는 바울의 긴 호소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는 차별의 벽을 먼저 허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로마서 10:12, 개역한글). 그러니 문제는 자격이 아니라 전달입니다. 부를 수 있는 문은 활짝 열렸는데, 그 문이 열렸다는 소식은 누가 가져다줄 것인가 — 14절부터의 질문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고대 고린도 유적의 아폴로 신전 기둥과 올리브 나무
고대 고린도의 아폴로 신전 유적 — 로마서 16장은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16:1)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16:23, 개역한글)를 언급합니다. 로마서가 고린도에서 로마로 보내진 편지로 읽히는 근거입니다 사진: Berthold Werner · CC BY-SA 3.0 · 출처 Wikimedia Commons

거꾸로 세운 사슬 — 다섯 개의 고리

14-15절의 네 질문은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바울은 결과에서 시작해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앞 문장의 끝말을 다음 문장이 그대로 받아 물고 늘어지는 방식인데, 개역한글은 이 맞물림을 한국어에서도 눈에 보이게 옮겨 놓았습니다. 네 개의 질문이지만, 각 질문이 두 가지를 맞물리게 하므로 결과적으로 다섯 개의 고리가 이어집니다.

  •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부름은 믿음에 매여 있고,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믿음은 들음에 매여 있고,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들음은 전파에 매여 있고,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전파는 보내심에 매여 있습니다.

이 질문들을 다시 뒤집어 놓으면 실제 사건의 순서가 나옵니다. 보내심 → 전파 → 들음 → 믿음 → 부름 → 구원. 다섯 고리 가운데 하나라도 끊기면 13절의 약속,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 사람에게 닿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 사슬을 곧이어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개역한글).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본문이 스스로 답해 둡니다. 조금 앞에서 그는 신명기 30:14를 인용한 뒤 그것을 곧바로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로마서 10:8, 개역한글)라고 규정했습니다. 사슬이 실어 나르는 짐이 무엇인지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빌립보서·골로새서가 이어진 파피루스 46 겹장, 헬라어 대문자 필사본
파피루스 46(P46)의 겹장 — 로마서 11장(13-22·24-33절)과 빌립보서 4장 끝, 골로새서 첫머리가 한 장에 이어져 있습니다. P46은 체스터 비티 도서관과 미시간대학교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으며, 이 겹장은 체스터 비티 소장분입니다 사진: 저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다섯 고리 중 오직 하나만 ‘받는’ 일입니다

개역한글 번역은 아주 중요한 차이 하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부르고, 믿고, 듣고, 전파하는 네 가지는 모두 사람이 하는 일로 적혀 있는데, 마지막 하나만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이라고 받는 쪽으로 적혀 있다는 점입니다. 헬라어 본문도 정확히 그렇습니다. 인터리니어로 확인해 보면 앞의 네 동사는 능동태나 중간태인데, ‘보냄’에 해당하는 동사(ἀποσταλῶσιν)만 수동태입니다. 게다가 이 수동태에는 ‘누구에 의해’를 밝히는 말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행위자가 비어 있는 이 자리를 성경은 다른 본문으로 채웁니다. 이사야가 들은 음성이 그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개역한글). 보내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대답하는 자리에 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도 같은 구조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21, 개역한글). 보냄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보냄받은 자의 권위는 자기에게 있지 않고 보내신 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태복음 28:19, 개역한글)는 자기 결단만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명령 바로 앞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개역한글)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파송의 권세는 보내는 분 쪽에 있고, 가는 사람은 그 권세를 위임받아 움직입니다.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 이사야 52:7

바울은 자기 논증을 자기 말로 마무리하지 않고 구약을 끌어옵니다. 15절 후반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는 이사야 52:7의 인용입니다. 이사야의 원래 문장은 좋은 소식과 평화와 구원을 공포하는 사람을 먼저 그려 놓고, 이렇게 맺습니다.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이사야 52:7, 개역한글).

이사야가 그린 장면은 전쟁이 끝난 뒤 승전 소식을 안고 산을 넘어 시온으로 달려오는 전령입니다. 전령이 외치는 내용은 "우리가 이겼다"가 아니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입니다. 소식의 주인공이 전령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이며, 아름다운 것도 전령의 얼굴이 아니라 발, 곧 여기까지 달려온 그 걸음입니다. 비슷한 장면이 나훔 1:15에도 되풀이됩니다.

바울은 이 한 사람의 전령을 여럿으로 바꿉니다. "전하는 자들의 발"이라고 복수로 적기 때문입니다. 시온으로 달려온 한 전령의 자리에, 이제 온 땅으로 흩어지는 무수한 전달자들이 들어섭니다. 지상명령이 "모든 족속"을 향하는 이유가 여기서도 확인됩니다.

새벽빛이 비치는 돌길을 따라 산을 넘어가는 고대 전령의 뒷모습을 그린 삽화
이사야 52:7의 "산을 넘는 발"을 형상화했습니다. 소식을 안고 넘어가는 그 걸음이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 실제 사진이 아닌 개념 그림입니다

"누구든지" — 사슬 끝에 놓인 요엘의 약속

사슬의 목적지인 13절도 바울의 창작이 아니라 인용입니다. 요엘서의 약속이 그 출처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 2:32, 개역한글). 바울은 여기서 "여호와"를 "주"로 읽으며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 조금 앞 9절이 그 근거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로마서 10:9, 개역한글).

흥미롭게도 이 요엘의 약속은 교회의 첫 설교에서도 똑같이 인용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아침에 요엘을 인용하며 그 대목을 이렇게 맺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2:21, 개역한글). 개역한글에서 이 두 문장은 인용 종결어 ‘하였느니라’를 빼면 한 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첫 설교와 로마로 보낸 편지가 같은 약속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슬이 이어졌다고 해서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곧바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로마서 10:16, 개역한글). 여기서 인용된 이사야 53:1의 개역한글 본문은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이사야 53:1, 개역한글)입니다.

주목할 점은 바울이 "다 듣지 아니하였도다"가 아니라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라고 쓴다는 것입니다. 사슬은 제대로 작동했고 소식은 실제로 도착했습니다. 이어지는 18절이 그것을 못 박습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로마서 10:18, 개역한글 — 시편 19:4 인용).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에게 ‘듣지 못했다’는 변명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지, 온 세상을 향한 전파가 이미 끝났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파하는 자가 짊어질 몫은 전달까지이고, 열매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사야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반응이 적다고 해서 보내심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쿰란에서 발견된 대이사야 두루마리의 이사야 53장이 실린 단, 히브리어 필사본
쿰란에서 발견된 대(大)이사야 두루마리 가운데 이사야 53장이 실린 단 — 로마서 10:16이 인용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가 이 안에 있습니다 사진: Ardon Bar Hama(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원본 촬영)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성경이 보여 주는 ‘보냄’의 세 층

첫째, 보냄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일할 사람을 모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명령이 나온 자리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태복음 9:36, 개역한글). 긍휼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기도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태복음 9:37-38, 개역한글).

이 기도는 곧바로 응답의 현장으로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는데, 그 장면의 첫머리는 이렇습니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누가복음 10:1, 개역한글). 보내달라고 기도한 사람이 곧 보냄받는 사람이 되는 구조입니다.

둘째, 교회는 예배 가운데 확인하고 안수하여 보냅니다

첫 선교사 파송 장면은 회의실이 아니라 예배 중에 일어났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사도행전 13:2, 개역한글). 그리고 교회의 행동이 이어집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사도행전 13:3, 개역한글).

여기서 성경은 표현을 아주 조심스럽게 나눕니다. 3절에서 사람을 보낸 주어는 교회이지만, 바로 다음 절은 이렇게 적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사도행전 13:4, 개역한글). 헬라어에서도 두 절의 동사가 서로 다릅니다. 교회가 한 일은 확인하고 내보내는 것이고, 실제로 보내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로마서 10:15에서 행위자가 비어 있던 수동태가 여기서 이름을 얻는 셈입니다.

여러 사람이 손을 얹어 안수하며 사역자를 파송하는 흑백 사진
1979년 브라질, 오스발두 프레이타스의 안수 — 북미에서 온 선교사들과 브라질 교회 지도자가 함께 손을 얹었습니다. 보냄받은 자가 다시 보내는 자가 되는 자리입니다 사진: Mennonite Church USA Archives · No known copyright restrictions · 출처 Wikimedia Commons

셋째, 보낸 뒤에도 책임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자기 계획을 밝히면서, 서바나(오늘의 스페인)로 가는 길에 로마를 들르겠다며 이렇게 청합니다.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로마서 15:24, 개역한글). 문간까지 배웅해 달라는 인사가 아니라, 다음 선교지까지의 여비와 동행을 대어 달라는 요청입니다. 로마 교회를 다음 선교의 발판으로 세우겠다는 뜻이지요. 그가 굳이 더 먼 곳까지 가려는 이유도 바로 앞 절에 적혀 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로마서 15:20, 개역한글). 이미 사슬이 이어진 곳이 아니라 아직 끊겨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원칙입니다.

이런 뒷받침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빌립보서가 보여 줍니다.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립보서 4:15, 개역한글). 바울은 그 후원을 단순한 돈이 아니라 예배로 읽습니다.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립보서 4:18, 개역한글). 고린도후서에서는 같은 후원을 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고린도후서 11:9, 개역한글).

오늘, 우리는 사슬의 어느 고리에 서 있습니까

바울의 사슬은 이천 년 전 이스라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그 사슬이 아직 이어지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고, 그 숫자는 생각보다 큽니다.

1892년 중국내지선교회 기관지에 실린 야외 전도 장면 판화
1892년 ‘China's Millions’(중국내지선교회 기관지)에 실린 야외 전도 삽화 — 보냄받은 자가 서는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한복판입니다(색은 후대에 강조를 위해 덧입혔습니다) 그림: 저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조슈아 프로젝트가 집계한 수치를 보면(2026년 8월 24일 조회 기준) 전 세계 16,426개 종족 가운데 미전도종족은 7,162개로 43.6%에 이르고, 그 인구는 약 36억 2천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44.0%입니다. 성경 번역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 영국 지부 통계(2026년 8월 3일 기준)에 따르면 전 세계 7,396개 언어 가운데 성경 전권이 번역된 언어는 805개이고, 아직 어떤 성경도 없는 언어가 3,229개입니다.

한국 교회의 ‘보냄’은 어떻습니까.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와 한국선교연구원이 함께 조사해 2025년 3월에 발표한 ‘2024 한국선교 현황’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한국 국적 장기 선교사는 171개국 21,621명입니다. 이는 전년 21,917명보다 296명 줄어든 수치로, 2020년부터 감소 추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장기 선교사의 평균 연령은 53.9세로 2020년 52.1세에서 계속 높아졌고, 응답자 기준 연령 분포는 50대 이상이 69.25%인 반면 30대는 6.05%, 20대는 0.46%에 그쳤습니다. 보내는 일이 멈춘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에서 새로 보내지는 사람이 눈에 띄게 적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0:14-15는 이 상황 앞에서 우리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을 남깁니다. 나는 이 사슬의 어느 고리에 서 있는가.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짚어 보십시오.

  • 기도하는 자리 — 마태복음 9:38의 명령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미전도종족 하나를 정해 이름을 적어 두고, 그 종족에게 보내질 사람을 위해 매일 한 번 기도해 보십시오.
  • 보내는 자리 — 빌립보 교회처럼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하는 후원은 시혜가 아니라 동역입니다. 액수보다 지속이 중요하니, 금액을 정해 정기 후원 한 건을 시작하고 선교 편지에 답장을 보내 보십시오.
  • 가는 자리 —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계획도 발이 없습니다. 지금 자리에서 떠날 수 없다면, 소속 교회에 단기 파송이나 훈련 과정이 있는지 이번 달 안에 확인해 보십시오.
  • 전하는 자리 — 땅끝은 늘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의 이름 하나를 수첩에 적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만날 약속을 잡아 보십시오. 그 한 사람이 곧 사슬의 끊긴 지점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의 문장은 발을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얼굴도, 말솜씨도, 성과도 아니고 발입니다. 소식을 안고 거기까지 간 걸음, 혹은 누군가를 그곳까지 보내 준 손 — 하나님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보십니다.

오늘 이렇게 기도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추수하는 주인이신 주님, 이 추수밭에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그리고 저를 어느 고리에 세우기 원하시는지 보여 주소서. 보내는 자리라면 아끼지 않게 하시고, 가는 자리라면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하게 하소서.” 그 기도에 응답이 올 때, 로마서 10:15의 사슬 한 칸이 우리를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

돌로 포장된 로마의 아피아 가도와 우산소나무가 늘어선 풍경
로마 근교의 아피아 가도 — 바울은 이 길 끝의 로마 교회를 서바나 선교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로마서 15:24) 사진: Livioandronico2013 · CC BY-SA 4.0 · 출처 Wikimedia Commons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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