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본 적이 있으신가요? 수백만 개의 불빛이 촘촘히 박힌 그 광경은 인간이 이룬 문명의 자랑이면서, 동시에 어딘가 서늘한 질문을 남깁니다. 하버드대 도시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는 「도시의 승리」(원제 Triumph of the City, 2011)에서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합니다. 도시야말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며, 우리를 더 부유하고 똑똑하고 친환경적이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도시 예찬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 글은 세속 도시경제학의 베스트셀러를 신앙의 시선으로 다시 읽으며, 겹치는 통찰과 갈라지는 지점을 함께 분별해 보려 합니다.
하버드 경제학자가 도시를 변호하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교수(Fred and Eleanor Glimp Professor of Economics)로, 도시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프린스턴대에서 학사를,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마친 그는 오랜 실증 연구를 「도시의 승리」 한 권에 응축했습니다. 국내에는 해냄출판사에서 이진원의 번역으로 출간되었고(초판 2011년, 개정판 2021년, 544쪽), 부제가 책의 논지를 그대로 요약합니다.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글레이저의 중심 테제는 단순하고 도발적입니다. 도시의 천재성은 ‘밀집(density)’에 있다. 사람이 촘촘히 모이면 아이디어가 더 빨리 확산되고, 이 지식의 순환이 혁신과 번영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실리콘밸리와 인도 방갈로르가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그는 통념을 여럿 뒤집습니다. 첫째, 도시가 오히려 친환경적이라고 말합니다. 밀집한 도시민은 자동차 의존이 낮아 교외 거주자보다 에너지를 훨씬 적게 쓴다는 것입니다. 둘째, 슬럼은 실패가 아니라 기회의 사다리라고 봅니다. 뭄바이 다라비 같은 빈민가에 가난한 사람이 몰리는 것은 도시가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도시가 시골의 더 극심한 가난보다 나은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셋째, 그는 “밖으로가 아니라 위로 지어라(build up, not out)”며 고층 건물과 건설 규제 완화를 강하게 옹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주장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도시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진: Don Ramey Logan · CC BY-SA 4.0 · 출처 Wikimedia Commons
겹치는 통찰: 성경도 도시를 버리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글레이저의 도시 긍정은 성경의 한 측면과 깊이 공명합니다. 신앙인 중에는 도시를 죄악과 타락의 온상으로만 여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정서를 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시를 단순히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벨론 포로기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뜻밖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예레미야 29:5, 7, 개역한글)
포로된 이방 도시에서 도피하지도, 무작정 동화되지도 말고, 그 성읍의 평안(샬롬)을 구하며 정착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도시 목회의 신학자 팀 켈러(Tim Keller)가 자신의 도시 신학에서 거듭 인용한 본문이 바로 이 예레미야 29:7입니다. 켈러는 「센터처치(Center Church)」에서 ‘도시 중심’을 복음 사역의 핵심 헌신 중 하나로 제시하며, 도시를 “복음 사역을 위해 놀랍고 전략적이며 여전히 충분히 섬김받지 못하는 곳”으로 보았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의 관심도 모인다는 통찰은, 글레이저가 “도시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지점과 뜻밖에 나란히 섭니다. 도시의 본질이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도 결국 그 도시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먼저 본 도시의 그늘 — 글레이저가 놓치는 차원
그러나 성경의 도시관은 글레이저의 낙관보다 훨씬 입체적입니다. 성경은 도시를 예찬하는 동시에, 도시의 뿌리에 드리운 그늘을 정직하게 응시합니다. 인류 최초의 성을 누가 쌓았는지 보십시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4:17, 개역한글)
최초의 도시를 세운 이는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이었습니다. 도시의 기원에는 이미 인간의 불안과 자기 방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그늘이 절정에 이른 사건이 바벨탑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개역한글)

그림: 피터르 브뤼헐(The Elder), 「바벨탑」(1563) · 공개도메인 · 출처 Wikimedia Commons
바벨의 동기는 “우리 이름을 내고“—곧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영광이었습니다. 도시는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기념비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심판하시어 언어를 혼잡케 하고 그들을 흩으셨습니다(창 11:8-9). 성경은 이 자기영광의 도시 계보를 끝까지 추적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인간 교만의 절정은 “큰 성 바벨론”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심판을 받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 개역한글). 4세기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도성」에서 세상의 도성(자기 사랑)과 하나님의 도성(하나님 사랑)을 대비시킨 것도 이 성경적 통찰 위에 서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글레이저가 닿지 못하는 차원이 드러납니다. 그는 도시를 인간 재능과 협력의 순수한 승리로 그리지만, 성경은 같은 밀집과 성취 안에 자기 이름을 내려는 교만이 함께 자란다는 것을 압니다. 실제로 세속 서평자들조차 글레이저가 도시 빈곤의 냉혹한 현실을 지나치게 가볍게 다룬다고 지적합니다. “가난해도 이파네마 해변은 즐길 수 있다”는 식의 환원적 낙관은, 슬럼에서 실제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충분히 담지 못합니다. 성경의 눈은 도시의 영광과 함께 그 그늘—착취, 소외, 외로움—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사진: erin (Evanston) · CC BY 2.0 · 출처 Wikimedia Commons
갈라지는 지점: 쌓아 올린 성인가, 내려받은 성인가
여기가 이 책과 성경이 가장 선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글레이저에게 도시는 인간이 밑에서 위로 쌓아 올린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바벨탑의 논리, 곧 “하늘에 닿게” 쌓아 올리려는 상승의 몸짓이 그의 책 전체를 관통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궁극의 도시는 정반대 방향에서 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2, 개역한글)

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 상징적 표현
바벨은 쌓아 올리는 성이고, 새 예루살렘은 내려받는 성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성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바란 것도 이 도시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10, 개역한글). 그들은 스스로 성을 쌓는 대신, 하나님이 건축자이신 성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이 …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개역한글).
이 대비는 도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류의 이야기가 동산(에덴)에서 시작해 도시(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도시 자체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redeem)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도시는 우리가 벽돌을 구워 쌓아 올려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내려받는 것입니다. 글레이저의 도시가 인간 능력의 정점을 가리킨다면, 성경의 도시는 그 정점 너머에서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도시를 사랑하되 도시를 신격화하지 않고, 도시를 세우되 “우리 이름을 내려” 세우지 않습니다.
지상명령의 자리에서: 도시는 모든 족속이 모이는 최전선
tgc.kr이 붙들고 있는 사명은 지상명령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개역한글). 그런데 오늘날 그 “모든 족속”은 어디에 모여 있습니까? 바로 도시입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글레이저가 실증한 ‘밀집의 힘’은, 선교의 언어로 옮기면 복음이 가장 넓게 퍼질 수 있는 증폭기가 도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통찰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는 처음부터 도시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아덴, 고린도(1년 6개월), 에베소(2년) 같은 제국의 대도시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고,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 개역한글)고 기록됩니다. 팀 켈러의 표현대로 “기독교 선교는 도시를 얻음으로써 고대 그레코-로마 세계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를 얻는 것이 곧 그 너머 온 지역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사진: Nettadi · CC BY-SA 3.0 ·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러나 도시 선교는 통계와 전략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라는 대도시를 두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개역한글).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개역한글). 도시의 통계 뒤에는 하나님이 아끼시는 얼굴들이 있고, 그 얼굴들을 향한 눈물이 있습니다. 글레이저는 도시를 ‘분석’하지만, 하나님은 도시를 ‘사랑’하시고 ‘우십니다’. 도시 선교의 출발점은 데이터가 아니라 그 눈물입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분별하며, 그러나 감사하며
「도시의 승리」는 기독교 신앙서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죄도, 구속도 이 책의 어휘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렌즈를 끼고 읽으면, 이 책은 우리가 도시를 얼마나 얕게 이해해 왔는지 일깨우는 훌륭한 거울이 됩니다. 글레이저가 관찰한 도시의 활력—밀집이 낳는 창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피어나는 문명—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심어 두신 질서의 조각들입니다. 다만 그 조각들의 온전한 그림, 곧 도시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성경 안에 있습니다.
이 책을 이렇게 권합니다. 도시에 살며 신앙과 삶의 자리를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도시 선교와 지역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붙들고 싶은 이에게, 그리고 세속 사회과학서를 신앙의 눈으로 분별해 읽는 훈련이 필요한 이에게 유익합니다. 다만 두 가지를 기억하며 읽으십시오. 첫째, 도시는 인간의 승리이기 전에 하나님이 아끼시는 사람들의 집이라는 것(욘 4:11). 둘째, 우리가 바랄 궁극의 도시는 쌓아 올리는 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성이라는 것(계 21:2)입니다. 그때 이 책은 우리를 도시의 예찬자가 아니라, 도시를 사랑하고 섬기며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제자로 이끄는 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렘 29:7).
참고 자료
- 알라딘 — 도시의 승리(개정판),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해냄, 2021 (서지정보·부제 확인)
- Penguin Random House — Triumph of the City (원서 전체 제목·부제·2011년 출간 확인)
- Wikipedia — Triumph of the City (중심 테제·구성 요약)
- Scientific American — Triumph of the City (book excerpt) (친환경 도시 논지·에너지 사용 비교 원문 발췌)
- National Civic League — Book Review: Triumph of the City (도시 빈곤·경제주의 편향 비판)
- Tim Keller / Lausanne Movement — What Is God’s Global Urban Mission? (도시 중심 선교 신학·초대교회 전략)
- Redeemer City to City / Gospel in Life — Why God Made Cities (Tim Keller) (하나님이 도시를 만드신 이유·도시 구속)
- Theology of Work — A Tale of Two Cities (Revelation 17–22) (바벨론 vs 새 예루살렘, 두 도시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