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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한 열등감』(알프레드 아들러) 서평 —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길 때마다, 동료의 승진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 안에서 조용히 올라오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왜 저만큼 못할까.” 비교와 불안이 공기처럼 깔린 시대에, 심리학의 거장 알프레드 아들러의 오래된 통찰이 2026년 새 옷을 입고 돌아왔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가 옮긴 『우월한 열등감』(저녁달)이다. 부제부터 우리 시대의 급소를 찌른다 — “비교와 불안의 시대,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자존감 교육.”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 초상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 프로이트·융과 함께 ‘심리학 3대 거장’으로 불린다.초상: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은 흥미로운 자리에 선다. 아들러는 우리가 매일 씨름하는 열등감의 정체를 예리하게 진단한다. 그러나 그 열등감의 해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에 이르면, 복음은 한 걸음 더 깊이 묻는다. 이 책을 신앙의 시선으로 함께 읽어 보자.

알프레드 아들러와 이 책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프로이트, 융과 더불어 흔히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프로이트와 가까웠으나,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이 성(性)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라는 견해 차이로 1911년 무렵 결별하고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을 창시했다. 열등감, 우월성 추구, 공동체감 같은 그의 개념들은 오늘날 자기계발서와 상담 현장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빈의 거리 프란츠 요제프 부두
아들러가 나고 자란 빈의 거리(프란츠 요제프 부두, 1890년대~1900년경).사진: Detroit Publishing Co. · 퍼블릭 도메인 · 출처 Wikimedia Commons

『우월한 열등감』은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옮긴 신간이다(저녁달, 2026년 4월 25일 출간, 376쪽).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지심리학자로 꼽히는 김 교수는 딱딱한 학술 이론을 대중적이고 명쾌한 언어로 풀어냈다. 출판사와 언론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의 원저는 1930년 미국에서 출간된 아들러의 저작으로, 빈에 상담소를 세워 아이와 어른을 치유했던 그의 임상 사례와 연구가 집약돼 있다고 한다. (아들러 열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와는 다른 책이다. 그것은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가 대화체로 쓴 해설서이고, 이 책은 아들러 자신의 저작을 옮긴 것이다.)

아들러가 말하는 ‘열등감’

이 책의 핵심 주장을 다섯 갈래로 간추리면 이렇다.

첫째, 열등감은 결함이 아니라 성장의 동력이다. 아들러에게 열등감은 어린아이가 거대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느끼는 무력감에서 출발하는, 누구도 예외 없는 보편적 감정이다. 그는 이것을 부끄러워할 병이 아니라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엔진으로 재정의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고 만들고 넘어서려는 모든 노력의 밑바닥에는 “지금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이 감각이 놓여 있다.

둘째, 그러나 열등감이 ‘콤플렉스’로 굳으면 위험하다. 아들러는 정상적인 열등감(inferiority feeling)과 병리적인 ‘열등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전자는 성장을 밀어 올리지만, 후자는 열등감이 지속되어 삶을 지배하고, 문제를 정면으로 풀기보다 회피하거나 남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이 부정적 힘이 잘못된 방향을 잡으면 기형적인 가식과 방어기제 — 그가 ‘우월 콤플렉스’라 부른, 겉으로 센 척하는 태도 — 로 변질된다.

바위 틈에서 자라나는 새싹
바위 틈을 뚫고 자라는 새싹 — 아들러는 열등감을 결함이 아니라 성장의 동력으로 보았다.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셋째, ‘우월성 추구’는 남을 짓밟는 것이 아니다. 아들러가 말한 ‘우월성 추구(striving for superiority)’는 흔히 오해받는다. 그것은 타인을 지배하려는 야망이 아니라 자기를 완성하고 실현하려는 방향의 힘이다. 아들러 자신도 이 용어가 오해를 부른다는 점을 인정했다. 실패가 두려워 아예 노력을 포기하거나 반항적 태도로 도망치는 ‘자기 불구화(self-handicapping)’는 이 힘이 좌절될 때 나타나는 그림자다.

넷째, 진짜 자존감의 뿌리는 경쟁이 아니라 기여다.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통찰이다. 아들러는 건강한 사람의 표지를 ‘공동체감(Gemeinschaftsgefühl, 사회적 관심)’에서 찾았다. 진정한 자존감은 남을 이기는 데서가 아니라, 타인과 협력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이다.

다섯째,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용기다. 열등감을 넘어 삶의 과제에 정직하게 직면하는 힘, 아들러는 이것을 ‘용기’라 불렀고 자신의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신앙의 시선(1): 아들러가 옳게 본 것

먼저 감사히 받을 것이 많다. 아들러가 열등감을 정죄하지 않고 ‘정상’으로 본 것은 은혜로운 통찰이다. 성경 역시 인간을 흙으로 지어진 유한한 피조물로,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그린다.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비교의 파괴성을 짚은 대목도 성경과 나란히 선다. 바울은 자기끼리 재고 견주는 태도를 두고 “지혜가 없도다”라고 단언했고(고린도후서 10:12),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며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기 앞의 소명을 보라고 권한다(갈라디아서 6:4).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맞잡은 손
서로 맞잡은 여러 손 — 아들러의 ‘공동체감’과 성경의 ‘그리스도의 몸’이 만나는 자리.사진: Wonder woman0731 · CC BY 2.0 · 출처 Wikimedia Commons

무엇보다 아들러의 ‘공동체감’은 복음의 심장과 깊이 닿는다. 위대함의 척도를 경쟁이 아니라 섬김에 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6-28, 개역한글)

성경은 이 섬김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림으로 확장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체이며,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함께 아파한다(고린도전서 12장). 자유조차 자기실현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는 데로 향한다(갈라디아서 5:13, 개역한글). 아들러가 심리학의 언어로 더듬어 간 그 방향을, 성경은 이미 공동체의 신학으로 품고 있었다.

신앙의 시선(2): 복음은 더 깊이 묻는다

그러나 정확히 이 지점에서 복음은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아들러는 자존감의 뿌리를 ‘내가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둔다. 훌륭한 통찰이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수평적이다 — 나의 쓸모, 나의 능력, 나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기여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진 날,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날, 그 자존감은 어디에 서 있는가?

복음은 자기 가치의 근거를 수직적인 곳으로 옮긴다. 인간의 존엄은 성취 이전에 이미 주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개역한글)

더 나아가 복음은 나의 가장 깊은 정체성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라고 선언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개역한글). 자랑할 것이 은혜뿐일 때, 비교의 사다리는 무너진다. 바울은 자기 존재의 중심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개역한글)

펼쳐진 성경 창세기 첫 장
펼쳐진 성경, 창세기의 첫 장. 복음은 인간의 가치를 성취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에 둔다.이미지: Eyre & Spottiswoode(1873년판) · 퍼블릭 도메인 · 출처 Wikimedia Commons

방향도 다르다. 아들러의 지도에서 성장은 열등을 딛고 ‘위로’ 오르는 상승이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오히려 낮아지는 길이다. 예수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 개역한글) 하셨고,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개역한글)라 권한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그 원형이다(빌립보서 2:5-8). 성장의 절정이 자기 부인(마가복음 8:34)이라니, 이것은 심리학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역설이다.

복음주의 목회자 팀 켈러는 이 역설을 날카롭게 표현했다. 그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사실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 둘 다 시선이 자기 자신에게 붙들려 있는 상태 — 다만 우월감은 부풀어 있고 열등감은 이미 꺼져 있을 뿐 — 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 주는 겸손은 자존감의 눈금을 억지로 올리는 것이 아니다. 켈러의 유명한 정의처럼, 복음적 겸손은 “자기를 더 높이 혹은 더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다. 자존감의 고저를 다투는 무대 자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아들러의 축을 넘어서는 복음의 대답이다.

두려움에 관해서도 그렇다. 아들러는 ‘용기’로 열등감을 넘어서라 한다. 옳은 말이지만, 복음은 그 용기의 근원을 내 안에서 짜내는 힘이 아니라 밖에서 부어지는 사랑에 둔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개역한글)

이 책을 누구에게, 어떻게 권하는가

자기 마음의 지형을 이해하고 싶은 그리스도인, 비교와 인정욕구에 지친 청년, 그리고 자녀와 학생을 세우는 부모·교사·상담 사역자에게 이 책은 좋은 지도가 된다. 김경일 교수의 문장은 쉽고 따뜻해서, 심리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도 부담 없이 아들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읽는 법을 제안하고 싶다. 이 책을 진단서로 읽되, 처방은 복음에서 받으라. 아들러의 지도는 우리가 앓는 열등감·비교·두려움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 준다. 그러나 최종 치료는 그리스도께 있다. 제자훈련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 제자는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값없이 사랑받은 자로서 자유롭게 섬기는 사람이다. 열등감의 낡은 서사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평결 위에 서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부제가 말하는 ‘단단한 사람’의 가장 깊은 뿌리다. 아들러는 우리를 그 문 앞까지 데려다준다. 문을 여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본문의 성경 인용은 공개도메인인 개역한글판(1961)을 따랐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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