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16:14-18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6:14-18, 개역한글)

지상명령 하면 흔히 마태복음 28장이 먼저 떠오르지만, 마가복음도 같은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앞뒤 맥락이 다릅니다. 마가복음의 지상명령은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신 바로 다음 절에서 시작됩니다. 실패와 불신앙 뒤에 주어지는 파송 — 이것이 이 본문을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문맥 — 세 번의 나타나심, 그리고 이어진 불신앙
마가복음 16:9-20은 세 번의 부활 현현으로 이어집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으나 제자들은 믿지 않았고(9-11절), 시골로 가던 두 사람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지만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12-13절). 그리고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 세 번째로 나타나셔서, 이번에는 그들의 불신앙과 완악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14절). 지상명령은 바로 이 지점, 세 번이나 반복된 불신앙을 뚫고 나오는 자리에서 주어집니다.
이 순서는 우연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자격이나 준비된 믿음이 파송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본문 자체가 보여줍니다. 부활을 목격하고도 믿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가서 전파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순종을 미룰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정직하게 짚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9-20(“긴 결말”)은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 같은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나오지 않고, 후대의 절대다수 사본과 옛 라틴어·시리아어 역본에는 포함되어 있어 본문비평학계에서 오래 논의되어 온 본문입니다. 그러나 2세기 교부 이레니우스는 「이단 반박」(약 180년경)에서 이미 16:19절을 마가복음의 결론으로 직접 인용했고, 개역한글을 비롯한 전통본문 계열 번역본은 이 본문을 정경으로 실어 왔습니다. 이 글은 그 학술적 논의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오랫동안 받아 지켜 온 이 본문을 성경으로 마주하고 그 메시지를 살피려는 것입니다.

지상명령의 다른 증언들과 나란히 — 성경은 성경으로
지상명령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걸쳐 다섯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본문은 같은 명령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춥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짚어 보면, 마가복음 16:15-18이 그중에서도 유독 뚜렷하게 드러내는 강조점이 보입니다.
마태복음은 제자화와 가르침을 앞세웁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개역한글). 누가복음은 증인 됨과 성령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누가복음 24:48-49, 개역한글). 요한복음은 파송 그 자체의 근거를 보여줍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21, 개역한글). 사도행전은 그 능력의 원천과 범위를 명시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개역한글).
마가복음은 이 넷과 달리 “복음을 전파하라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선포와 응답의 구조를 앞세우고, 다른 어느 병행 본문에도 없는 구체적인 표적 목록을 덧붙입니다. 제자화(마태), 증인 됨(누가·행전), 파송(요한)이 지상명령의 뼈대라면, 마가복음은 그 복음이 실제로 전파될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일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표적, 사도행전에서 실제로 일어나다
마가복음 16:17-18이 말하는 표적은 추상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이 표적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을 때 그대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사도행전 16:18, 개역한글). “새 방언을 말하며”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사도행전 2장)에서 확인됩니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는 바울이 멜리데섬에서 겪은 일과 정확히 겹칩니다. “바울이 한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사도행전 28:3, 5, 개역한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같은 섬에서 바울이 보블리오의 부친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한 사건(사도행전 28:8)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다섯 표적 중 “독을 마셔도 해 없음”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본문 안에서 직접 대응하는 사건을 찾을 수 없습니다 — 성경 내부의 근거로는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므로, 있는 그대로 밝혀 둡니다.

표적의 목적 — 하나님이 친히 증거하신 것
이 표적들의 성격을 성경 스스로 규정해 줍니다. 고린도전서는 성령의 은사가 모든 신자에게 획일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못박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린도전서 12:11, 개역한글).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 표적들이 애초에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밝힙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브리서 2:3-4, 개역한글). 표적은 전도자의 능력을 과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전파된 복음을 확증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늘의 적용 — 순종이 먼저, 표적은 뒤따릅니다
본문의 순서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서 전파하라”는 명령이 먼저이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는 그다음입니다. 표적이 순종의 조건이 아니라 순종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잡을 것은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세 번이나 목격하고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완전한 확신에 이른 다음에야 복음을 전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곁의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낯선 자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는 것, 결과와 표적은 성령이 그분의 뜻대로 나눠 주시는 영역임을 인정하고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는 것 — 이것이 마가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상명령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은 이레니우스의 시대에도, 사도행전의 현장에서도, 지금 우리의 순종 가운데서도 여전히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기도와 헌신의 초청
주님, 제자들이 부활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것처럼 저 역시 자주 믿음 없고 마음이 완악합니다. 그런 저를 꾸짖으신 후에도 “가서 전파하라” 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자격이나 준비됨을 핑계 삼지 않고 오늘 순종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그 결과와 표적은 주의 뜻대로 나눠 주시는 성령께 맡기게 하소서. 제가 어디에 있든 주께서 함께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아멘.
참고 자료
- 마가복음 16장 (개역한글, 대한성서공회 원문 서비스)
- 사도행전 28장 (개역한글, 대한성서공회 원문 서비스)
- 히브리서 2장 (개역한글, 대한성서공회 원문 서비스)
- 대한성서공회, 성경 번역본 저작권 안내
- Baker’s Evangelical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The Great Commission”
- Bible Hub, 마가복음 16:15 주석 모음
- 이레니우스, 「이단 반박」 3권 10장 (New Advent 영역본)
- Text & Canon Institute, “A Case for the Longer Ending of 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