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께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처음 건네신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평강”이었고, 곧이어 맡기신 것은 하나의 “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지상명령을 마태복음 28장으로만 기억하지만, 요한복음 20:21은 같은 사명을 전혀 다른 각도, 곧 보내심(파송)이라는 각도에서 비춥니다. 이 글은 요한복음 20:21이 밝히는 ‘보내심 받은 자의 지상명령’을 성경 본문과 그 성경 안의 상호참조를 따라 차근히 살펴봅니다.

※ 이 글의 성경 인용은 모두 개역한글판(1961, 공개도메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 명령: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본문의 정황부터 봅니다. 부활 당일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모여 있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 개역한글)
부활하신 주님은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분임을 확인시키셨고(20절), 이어서 같은 평강의 인사를 반복하시며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1, 개역한글)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파송에 앞서 평강이 먼저 선포됩니다.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제자가 환난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자기 용기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주신 평강입니다. 같은 다락방 강화에서 주님은 이미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라고 하셨습니다. 보내심은 언제나 그 평강 위에 세워집니다.

보내심의 사슬: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들이 우리를
요한복음 20:21의 무게 중심은 “~같이”라는 한 단어에 있습니다. 우리의 파송은 새로 고안된 사명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그 보내심에 접붙여진 사명입니다. 이 해석의 근거는 신학 이론이 아니라 요한복음 본문 자체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드리신 대제사장 기도에서 이미 이 파송을 예고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한복음 17:18, 개역한글)
17장의 “보내었고”가 20장에서 “보내노라”로 성취됩니다. 여기서 파송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뜻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려 오셨고(요한복음 6:38), 그 보내심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이었습니다(요한복음 3:17). 그렇다면 그 아들의 파송을 그대로 물려받은 우리의 파송 또한, 자기 사업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세상의 구원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보내심의 사슬 —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아들에게서 우리에게로 — 은 목적까지 함께 이어집니다.

구약에 뿌리내린 보내심
이 보내심은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기름부음 받은 종의 사명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사야 61:1, 개역한글)
예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바로 이 본문을 펴서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21)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누가복음 4:18 참조). 곧 이사야가 예언한 “나를 보내사”의 그 보내심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21의 “보내심”은 이 메시아적 파송의 연장선에 있으며, 우리는 그 오랜 구속 이야기의 가장 최근 장(章)으로 부름받습니다.

보내심에는 성령의 능력이 함께 옵니다
파송과 능력 부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20:21의 파송 바로 다음 절을 “이 말씀을 하시고”로 직접 이어 붙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22, 개역한글)
“숨을 내쉬며”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창세기 2:7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내심은 곧 새 창조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 패턴은 다른 지상명령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누가복음 24:49)라고 하셨고, 승천 직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라고 하셨습니다. 파송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의 근원이신 성령께 자신을 여는 일입니다.

보내심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그러면 보내심 받은 자는 세상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성경은 두 가지 이미지로 답합니다. 첫째, 우리는 전파하는 자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5, 개역한글)
바울은 전파의 전제로 “보내심”을 못 박습니다. 보내심이 없으면 전파도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대사)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20, 개역한글)
사신은 자기 뜻을 전하지 않고 보낸 왕의 뜻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 본문이 그려 준 그림 위에 하나의 신학적 언어를 조심스럽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선교학은 이를 ‘미시오 데이(Missio Dei)’, 곧 ‘하나님의 보내심’이라고 부릅니다. 선교의 주체는 교회의 열심이 아니라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며, 교회는 그 보내심에 참여하도록 파송된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의 뿌리와 검증은 언제나 성경 본문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요한복음 3:17),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보내시며(요한복음 14:26), 그 아들이 제자를 보내신다(요한복음 20:21)는 성경의 증언이 미시오 데이의 참된 근거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디로 보내심을 받았습니까
요한복음 20:21의 “너희”는 특정한 직분자만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 공동체 전체였습니다. 따라서 이 파송은 선교사와 목회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자리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 가정으로 보내심. 가장 가깝고 가장 어려운 선교지입니다. 말보다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첫 자리입니다.
- 일터로 보내심. 신실함과 정직으로 일하는 것 자체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딛는 현장입니다.
- 이웃과 관계로 보내심. 한 사람의 이름을 놓고 기도하며, 자연스러운 대화의 문이 열릴 때 담대히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입니다.
파송지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당신이 발을 딛는 바로 그곳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당신을 보내신 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나를 향해 안으로만 향하던 삶이, 부활하신 주님의 평강 위에서 세상을 향해 밖으로 돌아서는 것 — 그것이 보내심 받은 자의 지상명령입니다.
기도로 나아가기
주님, 부활의 평강을 먼저 주시고 저를 보내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과 목적으로, 오늘 제가 선 자리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되게 하소서. 제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담대히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