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장은 성경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으로 꼽힙니다.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온 땅을 홍수로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시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장에서 성경은 두 개의 단어를 처음으로 꺼내 놓습니다. ‘은혜’(창 6:8)와 ‘언약’(창 6:18)입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 두 복음의 단어가, 다름 아닌 심판 선언의 한복판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번 창세기 6장 강해에서는 개역한글 본문을 따라,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그러나 노아는”이라는 위대한 전환점을 함께 읽어 보려 합니다.

그림: 에드워드 힉스(Edward Hicks) 「노아의 방주」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죽음의 족보에서 홍수 이야기로 —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창세기 6장은 앞 장과 한 호흡으로 이어집니다. 5장의 족보는 여덟 번의 “죽었더라”를 지나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짓고 안위를 소망하는 장면(창 5:29), 그리고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는 장면(창 5:32)으로 끝났습니다. 6장 앞부분(1-8절)은 그 족보 시대의 결말 — 인류가 어디까지 무너졌는가 — 을 보여 주고, 9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열립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9 (개역한글)
“사적(事蹟)이 이러하니라”로 옮겨진 표현은 히브리어로 ‘톨레도트'(계보·내력)라 하며, 창세기 전체를 열 개의 단락으로 엮는 문학적 표지입니다. “천지의 창조된 대략”(창 2:4), “아담 자손의 계보”(창 5:1)에 이어 6장 9절은 그 세 번째 표제로, 여기서부터 9장 끝까지 이어질 노아 이야기의 문을 엽니다. 죽음의 족보가 끝난 자리에서 성경은 이제 심판과 구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6:1-4) — 무너진 구별
노아 시대의 타락을 성경은 한 결혼 풍속에서부터 읽어 냅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세기 6:1-2 (개역한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를 두고 여러 말들이 있어 왔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답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혈통이나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문맥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바로 앞 4-5장은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를 대조해 왔고, 셋의 줄에서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할 예배하는 계보요, 본문은 그 계보가 사람의 딸들과 뒤섞이며 구별을 잃어버린 사건을 고발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바로 다음 절의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창 6:3) 하신 말씀 — 성령의 인도를 저버린 세대를 향한 선언 — 과 자연스럽게 맞물립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취했습니다. 이 말투는 에덴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여 취하던 장면(창 3:6)을 그대로 메아리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별과 경계를 무시하고 눈에 좋은 대로 취하는 것 — 그것이 타락의 문법입니다. 그 시대에 “네피림”이라 불린 용사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네피림은 성경에서 여기와 민수기 13:33에만 나오는 말이며, 본문은 그들을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4)라고만 소개합니다. 사람들이 그 유명한 용사들을 우러르던 시대를, 하나님은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시한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6:3 (개역한글)
많은 해석자들이 이 120년을 홍수까지 남겨 두신 유예의 기간으로 읽어 왔습니다. 베드로가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벧전 3:20)라고 증언한 그대로, 심판의 시한조차 사실은 오래 참으심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 (6:5-7) — 하나님의 한탄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세기 6:5-6 (개역한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지으신 세계를 일곱 번 “보시고” 좋았다 하셨습니다(창 1:4, 10, 12, 18, 21, 25, 31). 그런데 이제 같은 하나님이 “보시고” 한탄하십니다. 본문의 언어는 철저합니다.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 — 죄는 몇몇 흉악범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마음의 생각 그 뿌리에 자리 잡았습니다. 신약의 바울이 시편을 인용해 확언한 그대로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개역한글)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성경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사무엘상 15장은 한 장 안에서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삼상 15:11)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를 나란히 둡니다. 성경 스스로 두 진술을 모순 없이 병치한 것입니다. 열쇠는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탄'(히브리어 나함)은 계획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인간적 후회가 아니라, 죄를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슬픔과 아픔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은 냉담한 심판자가 아니라, 지으신 사람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림: 미켈란젤로 「대홍수」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그러나 노아는” (6:8-10) —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은혜’
7절에서 멸절 선언이 내려진 직후, 성경 전체의 흐름을 바꾸는 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8 (개역한글)
히브리어 ‘헨'(은혜)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이 절이 처음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예순아홉 번 쓰이는 이 단어의 첫 자리가, 하필 심판 선언 바로 다음 절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심판의 그늘 아래서 가장 밝게 빛납니다. 순서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8절이 먼저 “은혜를 입었더라” 하고, 9절이 그 다음에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말합니다. 노아가 의로웠기에 은혜를 얻어 낸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기에 패괴한 세상 속에서도 의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엡 2:8 참조). 그 “동행”은 증조부 에녹의 길이기도 했습니다(창 5:24). 죽음의 족보를 깨뜨린 에녹의 동행이, 이제 심판의 세대 한복판에서 노아를 통해 이어집니다.
히브리서는 노아의 이 삶을 믿음의 언어로 풀어 줍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브리서 11:7 (개역한글)
패괴한 땅, 강포가 충만한 땅 (6:11-13)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창세기 6:11-12 (개역한글)
짧은 두 절에 “패괴”가 세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신 세계가 스스로 썩어 무너졌고, 그 부패는 “강포” —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폭력 — 로 땅에 가득 찼습니다. 주목할 표현은 “하나님 앞에”(창 6:11)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 시대는 용사들이 이름을 떨치는 번영의 시대였을지 모르나,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창 6:13)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변덕이 아니라, 오래 지켜보시고 오래 참으신 뒤에 내려진 공의의 결정이었습니다.
“너는 방주를 짓되” (6:14-16) — 구원의 설계도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은 같은 호흡으로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방주 건조 명령입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세기 6:14-16 (개역한글)

그림: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Building the Ark」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개역한글이 “잣나무”로 옮긴 원어 ‘고페르’는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말이라 정확한 수종은 알 수 없으며, 편백(사이프러스) 계열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방수를 위해 안팎에 칠한 “역청”(코페르)은 ‘덮다'(카파르)라는 동사에서 온 말인데, 이 동사는 훗날 ‘속죄하다’로 쓰이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어의 결이 그렇다는 것이지 본문의 직접적 가르침은 아니지만, 심판의 물을 막아 생명을 ‘덮는’ 방주의 그림이 속죄의 언어와 겹쳐 보이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치수는 놀랍도록 구체적입니다. 1규빗을 약 45cm로 계산하면 방주는 길이 135m, 폭 22.5m, 높이 13.5m — 길이 대 폭 대 높이가 30:5:3인 거대한 직육면체 구조물입니다. 이 비율은 현대 조선공학의 눈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1992-93년 한국창조과학회의 의뢰로 해사기술연구소(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KRISO)의 홍석원 박사팀은 방주를 1/50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비교 선박들과 함께 대형 수조에서 시험했는데, 방주의 비율이 구조 안전성·복원 안정성·내항 성능의 균형에서 근최적(近最適)이며 파고 30m가 넘는 해상 상태도 견딜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창조과학 진영의 국제 학술지(Creation Ex Nihilo Technical Journal, 1994)에 발표했습니다. 방주에는 돛도 키도 없었습니다. 항해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계와 보존이 그 배의 안전이었습니다.

사진: neufal54 · CC0(공개도메인 기증) · 출처 Wikimedia Commons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언약’ (6:17-22)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세기 6:17-18 (개역한글)

판화: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The Deluge」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여기서 성경의 또 하나의 첫 단어가 나옵니다. ‘언약’(히브리어 베리트)입니다. 구약에만 이백여든네 번 쓰이며 성경 신학의 등뼈가 될 이 단어의 첫 등장이, 홍수 심판 선언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도, 시내산 언약도, 그리고 예수님의 “새 언약”도 — 그 첫 실마리는 “그러나 너와는”이라는 노아를 향한 약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은혜가 그랬듯 언약도, 심판 속에서 태어난 구원의 언어입니다.
‘방주’라는 단어에도 성경의 세심한 결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테바’는 구약에 스물여덟 번 나오는데 전부 노아의 방주(창 6-9장)와 아기 모세를 담은 상자(출 2:3-5)에만 쓰입니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출 2:3) — 갈대 상자도 역청을 칠한 ‘테바’였습니다. 물의 심판과 위협을 통과해 생명을 건져 내는 구원의 그릇, 성경은 같은 단어로 두 구원을 포개어 놓았습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하라”— 창세기 6:19-20 (개역한글)
“네게로 나아오리니” — 동물들을 모으는 것조차 노아의 수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창조하신 생명을 “그 종류대로”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심판 계획 안에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은 한 문장으로 닫힙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22 (개역한글)
토를 달지 않고, 빼거나 더하지 않고, “명하신 대로 다”. 은혜를 입은 사람의 표지는 이런 단순하고 전면적인 순종입니다. 배를 본 적도, 그만한 비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수십 년에 걸쳐 배를 짓는 일 — 믿음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순종이었습니다(히 11:7).

그림: 얀 브뤼헐(Jan Brueghel the Elder)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방주가 가리키는 구원 — 노아에서 그리스도까지
신약 성경은 노아의 홍수를 전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로, 그리고 구원의 예표로 읽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베드로전서 3:20 (개역한글)
여기서 베드로가 붙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 방주를 예비하던 그 긴 세월이 곧 기다리심의 세월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구원받은 자의 적음 — 온 세상에서 겨우 여덟 명이었다는 것. 베드로후서는 노아를 “의를 전파하는 노아”(벧후 2:5)라 부릅니다. 방주를 짓던 세월은 침묵의 세월이 아니라 전파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홍수는 마지막 심판의 예고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벧후 3:6-7). 물의 심판이 실제였듯, 다가올 심판도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도 약속은 유효합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벧후 2:9).

사진: BabelStone · CC0(공개도메인 기증) · 출처 Wikimedia Commons
흥미롭게도 대홍수의 기억은 성경 바깥에도 남아 있습니다. 대영박물관에는 1872년 조지 스미스가 판독해 세상을 놀라게 한 ‘홍수 토판’ — 길가메시 서사시 제11토판 — 이 소장되어 있는데, 배를 지어 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닮은 겉모습 아래 두 기록의 세계관은 정반대입니다. 길가메시의 홍수는 신들의 회의에서 나온 변덕이고 그 배는 전복되기 쉬운 정육면체이지만, 창세기의 홍수는 죄악에 대한 거룩하신 한 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며 그 방주는 살 만한 비율로 설계된 구원의 그릇이고, 이야기의 끝은 생존자의 불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고대 세계에 널리 남은 홍수의 기억 위에서, 창세기만이 그 사건의 참된 의미 — 심판하시는 공의와 건지시는 은혜 — 를 증언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은 오늘 — 방주 문이 닫히기 전에
예수님은 자신의 다시 오심을 말씀하시며 다른 어느 시대도 아닌 노아의 때를 드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37-39 (개역한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 —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깨닫지 못하였으니”입니다. 일상에 파묻혀 하나님의 경고를 흘려듣는 것, 그것이 노아 시대 사람들의 멸망의 이유였고, 예수님은 마지막 때도 그러하리라 하십니다(눅 17:26-27 참조). 창세기 6장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방주 안에 있습니까? 방주의 문은 하나였고, 구원은 그 문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있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은혜를 입는 자리, 곧 그분 안이 우리의 방주입니다.
둘째, 나는 노아처럼 전파하며 짓고 있습니까? 노아는 은혜를 입은 뒤 조용히 혼자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를 전파하는 노아”(벧후 2:5)로 불렸고, 방주를 짓는 그의 망치 소리는 그 자체로 한 세대를 향한 설교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일도 같습니다. 심판이 오기 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마 28:19-20)을 따라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 — 그것이 노아의 길을 걷는 오늘의 방주 짓기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한복판에서 성경은 처음으로 ‘은혜’를 말했고, 심판 선언의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언약’을 말했습니다. 창세기 6장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홍수 전, 아직 문이 열려 있는 지금 — 너는 어디에 서 있느냐?”
참고 자료
- 개역한글판 창세기 — 위키문헌(공개도메인 성경 본문)
- Genesis 6 Interlinear — Bible Hub(히브리어 원어 대조)
- חֵן(헨, 은혜) 원어 사전·용례 — Bible Hub(창 6:8이 성경 최초 용례)
- Hong, S.W. 외, ‘Safety Investigation of Noah’s Ark in a Seaway’ — 해사기술연구소(현 KRISO) 방주 안정성 연구(1994)
- The Flood Tablet(길가메시 서사시 제11토판) — 대영박물관/Google Arts & Culture
- 노아는 방주를 얼마나 오래 지었고, 얼마나 오래 머물렀나 — GotQuestions 한국어판
- 대한성서공회 — 개역개정·새번역 등 다른 번역본 본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