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스즈키 유이) 서평 — 말의 출처보다 진실함을 묻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는 저녁 식사 자리. 홍차 티백을 뜯던 한 남자가 라벨에 적힌 영어 문장 하나에 시선을 멈춘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사랑은 모든 것을 뒤섞을 뿐 헝클어뜨리지 않는다).” 서명은 괴테. 그런데 평생 괴테를 연구해 온 독문학자인 그조차, 이 문장을 어디서도 읽은 기억이 없다. 이 사소한 발견이 한 학자의 인생 전체를 되짚는 탐색으로 번져 간다 — 2025년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鈴木結生)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원제 『ゲーテはすべてを言った』, 이지수 옮김, 리프, 2025)의 이야기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1828년, 요제프 카를 슈틸러 作)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 소설 속 문제의 인용문은 결국 그의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괴테 자신은 방대한 저작과 편지를 남겼다.초상: Joseph Karl Stieler(1828) · 퍼블릭 도메인 · 출처 Wikimedia Commons

지식과 인용, 진위와 의미를 다루는 이 소설은 얼핏 신앙과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을 쓴 스물세 살의 작가 자신이 목회자의 딸이며, 소설의 씨앗이 된 그 티백 에피소드조차 실제로 아버지와 겪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야기가 달리 읽힌다. 말의 진위보다 그 말이 삶 속에서 무엇을 낳는가를 묻는 이 소설을, 그리스도인의 시선으로 함께 읽어 보자.

스즈키 유이와 이 소설

스즈키 유이(鈴木結生, すずき ゆうい)는 2001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한 살 때 후쿠시마현으로 옮겨 열한 살까지 그곳에서 자랐고, 후쿠오카현립 슈유칸(修猷館)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세이난가쿠인대학 외국어학부에 진학했다. 2025년 인터뷰 시점 기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재학 중이다(23세). 2024년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책이 필요한가(人にはどれほどの本がいるか)」로 제10회 하야시 후미코 문학상 가작을 받으며 데뷔했고, 이듬해 첫 장편소설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로 제172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2025년 1월 발표, 안도 호세의 『DTOPIA』와 공동 수상). 21세기에 태어난 작가로는 최초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이었다.

주목할 것은 작가 자신의 고백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저는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僕は父親が牧師というクリスチャン家庭に生まれました)”라고 밝혔다. 철들 무렵부터 성경을 읽었고, 그것이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고전 독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파우스트』의 틀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욥기”라는 점이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도 말했다 — 실제로 괴테는 『파우스트』의 서장 ‘천상의 서곡’을 하나님과 사탄이 욥을 두고 나누는 대화(욥기 1~2장)를 본떠 썼다는 것이 오래된 문학적 정설이다. 그리고 소설의 발단이 된 티백 사건도 허구가 아니었다. “티백 에피소드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가 손에 든 괴테의 명언을 제게 보여주며 ‘이 말은 어느 책에 나오는 거야?’라고 물으셨어요(ティーバッグのエピソードは実際にあった出来事。父が手にしたゲーテの名言を僕に見せて、「この言葉はどの本に書いてあるの?」と聞いてきた).” 소설 속 학자 부자(父子)의 질문은, 실은 작가 자신의 목사 아버지가 던진 질문이었던 셈이다.

일본 도쿄의 한 서점 내부
일본 도쿄의 한 서점 내부. 작가 스즈키 유이는 이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약 500권의 책을 읽었다고 밝혔다.사진: Nesnad · CC BY 4.0 · 출처 Wikimedia Commons

스즈키는 이 한 편의 장편을 쓰기 위해 약 500권의 책을 읽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성경에서 시작해 세계문학 전반으로 뻗어나간 그의 독서 이력이, 지식과 인용이 정교하게 직조된 이 소설의 토양이 된 셈이다.

줄거리 — 홍차 티백이 쏘아 올린 탐색

주인공 히로바 도이치(博把統一)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괴테 연구자로, 오랫동안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 온 정년이 가까운 학자다. 결혼 25주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낯선 인용문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는 아내 아키코, 딸 노리카(徳歌 — 이름을 거꾸로 읽으면 중국어로 ‘歌德’, 즉 ‘괴테’가 된다)와 함께 이 한 문장의 출처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도서관과 문헌을 뒤지고, 마침내 독일까지 건너가는 여정은 단순한 문헌 조사를 넘어 그가 평생 붙들어 온 학문과 인생을 되돌아보는 여행이 된다. 이 모든 이야기는 도이치의 사위, 즉 노리카의 약혼자였던 화자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 화자가 도이치의 사위라는 사실은 결말의 반전이 아니라 이야기 도입부에서부터 밝혀진 채로 서술이 시작된다.

피라미드형 실크 홍차 티백
홍차 티백 — 소설은 이런 티백 라벨에 적힌 낯선 괴테의 문장 하나에서 시작된다(예시 사진, 소설 속 실제 소품은 아님).사진: Shaddack · 퍼블릭 도메인 · 출처 Wikimedia Commons

장인의 집요한 탐구를 곁에서 지켜본 사위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옮겨 적는 형식이 이 작품의 액자다. 그리고 결말에서 반전이 기다린다. 문제의 인용문은 사실 어느 명언 모음 사이트에서 퍼 온 것이었고, 그 출처를 더 거슬러 올라가자 — 놀랍게도 괴테와는 무관하게, 아내 아키코가 즐겨 보던 한 ‘정원사 유튜버’에게 보내진 편지에서 비롯된 문구였음이 드러난다. 인용의 권위는 결국 허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허탈한 반전이 이야기를 냉소로 몰아가지는 않는다. 진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오히려 이 긴 탐색의 여정 자체가 흩어져 있던 가족의 마음을 다시 이어 놓았다는 사실이 남는다.

이야기의 프롤로그 말미에서 도이치는 이렇게 자문한다 — “설령 좋은 말이 모두 연기(演技)라 해도, 그 안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연습하며 입에 붙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움을 획득하면, 마침내 그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그 시점까지의 잠정적 해석일 뿐이지만, 이 문장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를 압축한다. 인용문의 권위가 괴테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듯, 이 소설이 진짜로 묻는 질문도 “이 말이 정말 괴테의 것인가”가 아니라, “이 말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가는가”였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이 소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는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 알고 싶어하는 것 — 인간이 지닌 그런 근원적인 기쁨이 이 소설에는 가득하다”며 호평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현학취미(페단트리)가 이렇게까지 철저해지면 훌륭한 것”이라 평하며 젊은 작가의 박람강기(博覽強記)와 일종의 노숙함에서 큰 재능의 출현을 느꼈다고 밝혔고, 다양성과 정보의 진위라는 오늘의 문제에 새로운 시점을 열었다고도 짚었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아카데미즘과 문학의 관계를 다루는 구성과 디테일에 감탄해 즉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다만 모든 평가가 상찬 일색은 아니었다. 심사위원 오쿠이즈미 히카루는 지적 유희성은 인정하면서도, 정작 중심인물인 학자 일가에게 삶의 그늘(음영)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내 독자들의 반응에서도 이 소설은 사건보다 사유가 펼쳐지는 ‘백과사전형 소설’로, 움베르토 에코나 보르헤스의 지적 유희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이 많다. 방대한 지식과 인용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은, 읽는 이에 따라서는 지식 그 자체에 도취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위험 자체가 소설이 스스로 겨냥하는 과녁이기도 하다. 소설은 권위 있는 이름(괴테)에 쉽게 설득되는 지식 사회의 허영을 은근히 꼬집으면서, 동시에 방대한 텍스트에 몰두하느라 가족의 외로움을 놓칠 뻔한 학자의 맹점을 함께 그려낸다.

독일 바이마르의 괴테하우스 외경
괴테가 만년을 보낸 독일 바이마르의 집(괴테하우스) 외경.사진: Axel Hindemith · CC BY-SA 3.0 · 출처 Wikimedia Commons

신앙의 시선(1): 소설이 옳게 짚은 것

이 소설이 도달한 결론 — 말의 가치는 출처의 권위가 아니라 그것이 삶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가에 있다는 것 — 은 성경의 통찰과 놀랍도록 가깝다. 성경도 말을 그 기원이 아니라 진실함과 실천으로 판단한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잠언 12:22, 개역한글)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도이치가 남긴 그 문장 —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 은 뜻밖에도 시편 기자의 고백과 정확히 포개진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개역한글)

시편 기자에게도 말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입에서 나온 말과 마음의 묵상은 함께 하나님 앞으로 ‘던져지는’ 기도가 된다. 소설이 문학의 언어로 더듬어 낸 통찰을, 성경은 이미 오래전 기도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실한 말을 향한 이 소설의 갈망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과도 맞닿는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마태복음 5:37, 개역한글)

화려한 인용과 권위 있는 이름 뒤에 숨지 않는 말, 꾸밈없이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정직함 — 소설이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이자, 성경이 처음부터 요구해 온 자리이기도 하다.

신앙의 시선(2):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나 정확히 이 지점에서 복음은 소설이 멈춘 자리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소설은 말의 권위가 그 출처(누가 말했는가)가 아니라 사용(어떻게 쓰였는가)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옳은 통찰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애초에 모든 말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묻는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개역한글)

1873년판 성경, 창세기 1장이 펼쳐진 면
1873년판 성경, 창세기 1장이 펼쳐진 면. ‘태초에’로 시작하는 이 장은 요한복음 1장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와 포개진다.이미지: Eyre & Spottiswoode(1873년판) · 퍼블릭 도메인 · 출처 Wikimedia Commons

소설 속 그 인용문은 결국 괴테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 화려해 보이던 출처는 알고 보니 이름 없는 편지 한 통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가리키는 ‘말씀’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출처가 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이 무겁고 진지한 이유는, 우리의 말이 이 근원적인 ‘말씀’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을 가볍게 다루는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야고보서 3:2, 9-10, 개역한글)

야고보의 경고는 소설이 그린 학자의 초상과도 겹쳐 읽힌다. 도이치는 평생 괴테의 ‘말’을 연구했지만, 정작 자기 곁의 가족에게 하는 ‘말’에는 소홀했을지 모른다는 것이 이 소설의 숨은 반성이다. 말을 다루는 학문(지식)과 말로 살아내는 삶(관계)은 다른 문제다. 성경은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정확히 찌른다 —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무심하거나 날 선 말을 던지는 모순 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말에는 소설이 다다르지 못한 또 하나의 무게가 더해진다. 바로 언약적 신실함이다. 신학자 J. I. 패커는 그리스도인이 진실을 보존하고 증진할 의무, 즉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한 말과 서약을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을 강조한 바 있다 —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뿐 아니라 우리의 말도 진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지상명령의 언어와도 곧바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개역한글)

지상명령의 언어는 ‘가르쳐'(말)와 ‘지키게 하라'(삶)를 결코 떼어놓지 않는다. 제자훈련이란 결국 말이 삶으로 확인되기까지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다. 소설이 “말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라고 말했다면, 복음은 그 기도가 누구를 향하며 누구의 능력으로 응답되는지를 알려준다 — 우리의 말이 헝클어지지 않고 결국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은 소설의 티백 문구처럼 그저 ‘연습’과 ‘자연스러움’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루시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노을 하늘로 흰 새와 종이가 함께 날아오르는 손의 실루엣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 손을 떠난 말이 빛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이 책을 누구에게, 어떻게 권하는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지적 즐거움이 큰 소설이다. 문학과 인용, 학문의 세계를 좋아하는 독자, 가족 이야기에서 뜻밖의 감동을 얻고 싶은 독자에게 특히 잘 맞는다. 다만 방대한 지식과 인용이 쏟아지는 만큼, 처음 몇 장은 다소 낯설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천천히 곱씹으며 읽을 여유가 있는 독자에게 권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읽어 보면 좋겠다 — 이 소설을 ‘질문’으로 받고, ‘답’은 복음에서 받으라. 소설은 말의 권위가 출처가 아니라 삶에 있다는 좋은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삶을 지탱하는 궁극의 근원, 우리의 말이 흘러나오는 자리, 그리고 그 말이 마침내 사랑으로 완성되는 힘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이다. 저자 스즈키 유이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질문 — “이 말은 어느 책에 나오는 거야?” — 에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궁극의 근원은 태초부터 계신 그 ‘말씀’이시라고.

본문의 성경 인용은 공개도메인인 개역한글판(1961)을 따랐다.

참고 자료

  •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리프, 2025. — 알라딘 도서 정보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심사평(選評) — prizesworld.com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소개(鈴木結生) — prizesworld.com
  • 작가 인터뷰(가정환경·집필 배경) — goetheweb.jp
  • [북 리뷰]『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브런치
  • J. I. Packer, “Christians Must Be Truthful” — Crossway
  • 야고보서 3장, 개역한글(대한성서공회 1961) — bible.com (KRV)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