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독하다가 창세기 5장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춥니다. 낯선 이름과 까마득한 숫자가 같은 문장 틀에 담겨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아무개는 몇 세에 아들을 낳았고, 그 후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열 번 가까이 되풀이되는 이 후렴은 지루한 명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무겁고도 가장 소망에 찬 한 장(章)입니다. 이 족보는 죽음이 어떻게 온 인류를 통치하게 되었는지를 증언하는 동시에, 그 죽음의 행렬을 뚫고 이어지는 한 줄기 생명의 계보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입니다. 이번 창세기 5장 강해에서는 개역한글 본문을 따라 그 두 얼굴 — 죽음의 조종(弔鐘)과 감춰진 복음 — 을 함께 읽어 보려 합니다.
이 글의 성경 인용은 모두 공개도메인인 개역한글판(1961)을 따릅니다. 개역개정·새번역 등 다른 번역본 본문은 대한성서공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진: Lawrie Cate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 새로운 문이 열리다
창세기 5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세기 5:1-2 (개역한글)
“계보가 이러하니라”로 옮겨진 표현은 창세기 전체를 열 개의 단락으로 엮는 문학적 표지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톨레도트'(계보·족보·내력)라 하는데, 창세기는 이 공식으로 “천지의 창조된 대략”(창 2:4), “노아의 사적”(창 6:9)처럼 매번 새로운 이야기의 문을 엽니다. 그러므로 5장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라, 아담에게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새로운 단락의 시작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족보가 창조의 언어로 문을 연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사람의 기원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형상대로”(5:1)라고 못 박습니다. 죽음의 명단을 나열하기 직전에, 사람이 본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먼저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 첫 두 절이 없었다면 5장은 그저 무덤들의 목록에 그쳤을 것입니다.
두 계보 사이에서 — 가인의 줄과 셋의 줄
5장을 바르게 읽으려면 바로 앞 4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4장은 가인의 계보를, 5장은 셋의 계보를 나란히 놓아 두 길을 대조합니다. 성경은 이 대조를 스스로 설명해 줍니다. 셋이 태어났을 때 하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세기 4:25 (개역한글)
셋은 아벨을 대신하는 “다른 씨”, 곧 창세기 3:15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의 계보를 이어 갈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라고 했으니, 셋의 줄은 예배하는 자들의 줄입니다.
이 두 계보의 성격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에서 극명하게 갈립니다. 가인의 줄에도 라멕이 있고 셋의 줄에도 라멕이 있습니다. 가인의 줄 라멕은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 4:23-24)라며 복수를 자랑합니다. 반면 셋의 줄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지으며 여호와를 인정하고 안식을 소망합니다(창 5:29). 또 가인의 줄에도 에녹이 있어 그의 이름을 딴 성(城)이 세워졌지만(창 4:17), 셋의 줄 에녹은 성을 쌓는 대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5:24). 같은 이름, 정반대의 길입니다.

판화: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하나님의 형상, 셋에게로 이어지다
족보의 첫 고리에서 성경은 의미심장한 표현을 씁니다.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세기 5:3 (개역한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이라는 말은 우연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쓰신 바로 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개역한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됩니다. 1장 27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형상”이, 5장 3절에서 아담을 통해 셋에게로 전해집니다. 여기에 성경의 무거운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담이 물려준 것은 하나님의 형상만이 아니라 죄와 죽음이 밴 자기 자신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셋의 후손도 하나같이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홍수 심판 뒤에도 하나님은 살인을 금하시며 그 근거로 형상을 드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형상은 훼손되었으나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5장의 족보는 그 손상된, 그러나 여전히 존귀한 형상이 대를 이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그림: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죽었더라” — 여덟 번 울린 조종(弔鐘)
5장을 통독하면 귀에 박히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죽었더라.”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5:5), 셋도, 에노스도, 게난도, 마할랄렐도, 야렛도, 므두셀라도, 라멕도 — 여덟 번에 걸쳐 이 후렴이 조종처럼 울립니다. 성경 어느 장보다 “죽었더라”가 많이 나오는 장입니다. 구백 년을 넘게 살았어도 결론은 예외 없이 같습니다. 죽음.
왜 이토록 오래 산 사람들이 결국 다 죽는가? 성경은 그 답을 창세기 안에 이미 심어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고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라고 경고하셨습니다. 5장의 반복되는 죽음은 그 경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곧 말씀대로 성취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창세기의 사실을 신약에서 이렇게 풀어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개역한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개역한글)
사람이 죽는 것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의 여덟 번의 “죽었더라”는 곧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진리를 여덟 번 확인 도장 찍는 셈입니다. 이 무거운 반복이 있기에, 바로 뒤에 이어지는 단 한 사람의 예외가 그토록 눈부시게 빛납니다.

그림: 프란시스퀴스 헤이스브레흐츠(Franciscus Gijsbrechts)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에녹, 죽음의 행렬을 깨뜨린 동행
여덟 번 울리던 조종이 일곱 번째 인물에게서 문득 멈춥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22, 24 (개역한글)
에녹에게는 “죽었더라”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죽음이 왕 노릇 하는 족보 한복판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진 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은 이 사건의 핵심을 믿음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11:5 (개역한글)
창세기가 “하나님과 동행”이라 부른 것을,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라 풀어 줍니다. 그리고 곧바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라고 덧붙입니다. 에녹의 특별함은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동행’은 한 번의 극적인 체험이 아니라 삼백 년을 하루같이 걸어간 방향이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처럼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 동행은 뜻을 같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에녹의 동행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같은 표현을 그의 증손 노아에게도 씁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또한 훗날 엘리야도 죽음을 보지 않고 회오리바람으로 하늘에 올라갔습니다(왕하 2:11). 죽음의 통치가 절대적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몇몇 사람을 통해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표징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신약은 에녹을 예언자로도 기억합니다. 유다서는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주의 심판을 예언했다고 전합니다(유 1:14-15) — 실제로 아담부터 세어 에녹은 정확히 일곱째 대입니다.

판화: 헤라르트 후트(Gerard Hoet)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가장 오래 산 사람도, 결국 “죽었더라”
에녹의 아들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 므두셀라입니다.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27). 969년 — 인간 수명의 최고 기록입니다. 일부 전통적 해석은 므두셀라의 이름과 훗날의 홍수 심판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본문이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이 분명히 강조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심지어 969년을 살아도, 결국은 “죽었더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만이 그 후렴에서 벗어났습니다. 므두셀라의 장수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증언하지만, 동시에 오래 사는 것 자체가 구원이 아님을 조용히 일러 줍니다.

사진: Jerrye and Roy Klotz MD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라멕의 탄식과 ‘안위’라는 이름
족보의 끝자락, 셋의 줄 라멕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에 자기 시대의 탄식과 소망을 함께 담습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세기 5:29 (개역한글)
라멕이 말한 “땅의 저주”와 “수고”는 막연한 넋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언하신 바로 그 저주를 가리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라멕은 조상 대대로 이어진 그 저주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며, 아들에게서 안식과 위로를 소망했습니다. ‘노아’라는 이름 자체가 ‘쉼·위로’와 이어지는 말입니다.
물론 노아 한 사람이 저주를 완전히 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라멕의 소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홍수 심판 가운데서도 한 가족과 약속을 건져 내셨고(창 6장), 그 계보를 통해 마침내 참된 안식을 주실 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5장은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 5:32)로 끝나며, 곧이어 펼쳐질 홍수 이야기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죽음의 족보는 이렇게 소망의 이름 하나를 남기고 다음 장으로 이어집니다.
족보 속에 감춰진 복음 —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
창세기 5장의 이름들은 그저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신약은 바로 이 계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잇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이렇게 끝맺습니다.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복음 3:37-38 (개역한글)
창세기 5장에 나온 셋·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의 이름이 그대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다. 역대상 1장 1-4절도 아담·셋·에노스에서 노아·셈·함·야벳까지 같은 계보를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5장의 “죽었더라”의 행렬은 여자의 후손(창 3:15)이 오시는 길을 죽음 속에서도 지켜 낸 통로였습니다. 죄와 죽음이 온 인류를 삼키는 듯 보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셋에서 노아로, 노아에서 아브라함으로, 마침내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생명의 실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이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며 족보를 하나님께로 되돌린 것은, 이 모든 계보의 처음과 끝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표면적으로 죽음의 명단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약속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림: 작자 미상, 라익스뮈세윔 트벤터 소장 · 공개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오늘, 우리는 누구와 동행하는가
창세기 5장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첫째, 죽음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있습니까? 여덟 번의 “죽었더라”는 우리 각자의 이름 뒤에도 언젠가 붙을 문장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애써 외면하지만, 성경은 죽음을 직시하게 하고 그 뿌리인 죄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롬 6:23)이라는 복된 소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죽음을 아는 사람만이 생명의 은사를 갈망하게 됩니다.
둘째,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에녹의 동행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삼백 년의 평범한 순종이 쌓인 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 내일 또 그런 선택 — 그렇게 방향을 같이하는 것이 동행입니다. 우리가 성을 쌓는 가인의 에녹의 길을 갈지, 하나님과 걷는 셋의 에녹의 길을 갈지는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매일의 걸음에서 갈립니다. 지상명령은 그 동행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나님과 걷는 사람이 이웃을 그 길로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족보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한 사람이 있었고, 그 계보 끝에서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기신 한 분이 오셨습니다. 창세기 5장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느냐?”
참고 자료
- 개역한글판 창세기 — 위키문헌(공개도메인 성경 본문)
- Genesis 5 — Bible Hub(본문·여러 번역 대조)
- Genesis 5:24,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 BibleRef 해설
- Genesis 5:3 주석(하나님의 형상과 셋) — Bible Hub Commentaries
- Genesis 5:29 주석(노아·‘안위’) — Bible Hub Commentaries
- Genesis 5 — Enduring Word 강해
- 므두셀라의 이름과 홍수를 잇는 전통적 해석에 관한 논의 — Answers in Genesis
- 대한성서공회 — 개역개정·새번역 등 다른 번역본 본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