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 소설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가 나왔다. 그리고 그해 여름, 서점가에 이변이 일어났다. 배우 박정민의 추천과 입소문을 타고 이 낯선 제목의 소설집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고, 9월에는 누적 판매 20만 부를 넘겼다. 그해 8월에는 제43회 신동엽문학상까지 받았고, 이듬해 4월에는 누적 판매 40만 부를 기념해 양장 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혼모노(本物)”라는 일본어에서 온 말은 “진짜, 진품”이라는 뜻이다.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많은 독자가 “무엇이 진짜인가”를 묻는 이 소설에 반응했을까. 그리스도인 독자의 눈으로 이 질문을 한 번 따라가 보려 한다.
저자와 작품
성해나는 1994년생으로,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즈」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혼모노」는 그의 두 번째 소설집으로, 표제작 「혼모노」를 포함해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등 단편 7편이 실려 있다(368쪽). 이 소설집으로 성해나는 2024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2024·2025년 젊은작가상에 이어 2025년 신동엽문학상까지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를 파노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놓는 탁월한 착상과 개성적인 에너지”를 수상 이유로 꼽았다.

줄거리 — 신이 떠난 자리
표제작의 화자 ‘문수’는 30년 경력의 박수무당이다. 그를 지켜 온 신령 ‘장수 할멈’이 어느 날 그에게서 떠나간다. 공교롭게도 앞집에 이사 온 스무 살 남짓의 ‘신애기’가 나타나, 장수 할멈이 문수는 너무 늙었다며 자신에게 왔다고 주장한다. 30년간 자신의 신앙이 ‘진짜’라고 믿어 온 문수에게, 이는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단골이던 국회의원마저 신애기 쪽으로 돌아서자, 문수는 신애기가 주관하던 그 단골의 굿판에 뛰어들어 격렬한 신내림 상태로 판을 뒤엎는다. 그러나 소설은 이 장면을 통쾌한 승리로 그리지 않는다. 여러 리뷰에 따르면 결말의 문수는 오히려 ‘누가 진짜냐’는 물음 자체에서 놓여나며, 명예도 젊음도 진짜와 가짜라는 구분마저도 더는 중요치 않다고 느끼는 낯선 해방감에 이른다. 경향신문 서평은 이 이야기가 “진짜라고도 가짜라고도 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고민”을 다루며, 이 관심사가 소설집 전체 7편을 관통한다고 평했다.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
「혼모노」가 독자를 붙드는 힘은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 남긴다는 데 있다. 크게 세 갈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진짜’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문수의 신앙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30년 세월도, 그의 믿음의 진정성도 아니다. 신령이 어느 날 그를 떠나 더 젊은 몸으로 옮겨갔다는 사실 하나다. 정체성의 근거가 철저히 외부의, 그것도 변덕스러운 영적 존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둘째, 세대와 전통의 충돌이다. 매일신문 리뷰는 이 소설집이 신구 세대 갈등, 전통과 현대의 대립을 함께 담고 있다고 짚었다. 나이 든 무당과 젊은 신애기의 대립은 단지 무속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진정성’을 놓고 다투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기도 하다.
셋째, 존재론적 불안이다. 한국경제에 실린 문학평론가 신승민의 평은 성해나의 문체가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 독자가 믿어온 관계와 신념의 기저를 흔든다고 분석했다. 소설은 무속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실은 모든 독자가 한 번쯤 마주하는 질문 — “내가 믿는 것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정말 진짜인가” — 를 건드린다.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 다른 저울
「혼모노」는 문학적으로 성취가 뚜렷한 작품이다. 인물의 심리를 촘촘하게 파고드는 문장, 낯선 세계를 낯설게 그대로 두면서도 독자를 끝까지 붙드는 구성은 이 소설이 왜 그렇게 많은 독자에게 가닿았는지 납득하게 한다. 다만 그리스도인 독자라면, 이 소설이 다루는 소재 자체 — 무속신앙 — 앞에서는 다른 저울을 꺼내 들 필요가 있다.
성경은 무속을 미신 취급하며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구체적으로, 매우 단호하게 다룬다.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신명기 18:10-12, 개역한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이 이 목록을 나열하신 직후 대안을 제시하신다는 점이다(신 18:15-19) — 이방 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세우실 ‘한 선지자’를 듣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논리는 “무속은 나쁘니 아무것도 믿지 말라”가 아니라, “가짜 영매 대신 참된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을 영적 체험의 강도나 지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로 보내신 것이냐에 두는 것이다.
이 기준은 신약에서도 이어진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법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마태복음 7:15-16, 개역한글)
더 나아가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참 제자가 아닐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마태복음 7:21-23). 영적 능력이나 신비 체험 자체가 진위의 증명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요한1서 역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개역한글)고 가르친다. 「혼모노」 속 문수와 신애기는 신령의 소유 여부로 ‘누가 진짜냐’를 다투지만, 성경은 애초에 그 질문의 저울 자체를 바꾼다 — 진짜의 기준은 신령이 누구에게 머무느냐가 아니라, 그 영이 누구를 가리키느냐다.

‘진짜’는 결국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이 질문에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답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개역한글)
「혼모노」의 세계에서 ‘진짜’는 늘 유동적이다. 오늘의 진짜가 내일은 가짜로 매도되고, 그 기준은 신령의 변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는 다르다. 흘러가는 영적 체험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인격 —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요 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던진 질문에 성경이 주는 답이다. 진짜냐 가짜냐를 놓고 평생 씨름할 필요 없이, 애초에 진리이신 분을 알면 된다는 것.

추천 독자 그리고 우리의 자리
「혼모노」는 잘 쓰인 소설이고, 그리스도인 독자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다만 무속의 세계를 그저 신기하거나 낭만적인 소재로만 소비하지 않고, 그 배후의 영적 질문까지 붙잡고 읽는다면 더 깊이 남는 독서가 될 것이다. 40만 부 넘게 팔렸다는 사실은, 이 시대 사람들이 여전히 무속이라는 오래된 신앙 형태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 동시에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에 목말라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지상명령(마 28:18-20)이 여전히 절박한 이유다. 무속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 속에서, 참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옛날의 과업이 아니라 오늘의 과업이다.
동시에 이 소설은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문수가 흔들렸듯, 우리의 신앙도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러나 흔들림 앞에서 물어야 할 것은 “내 신앙이 강한가, 오래되었는가”가 아니라 “내가 믿는 분이 정말 그분인가”다. 제자훈련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 감정이나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말씀 위에 굳게 선 진리를 붙드는 것.

문수는 소설 끝에서 ‘진짜냐 가짜냐’를 증명하는 대신, 그 물음 자체를 내려놓는 낯선 해방에 이른다. 그러나 그 해방은 확고한 진리 위에 선 것이 아니라, 지쳐서 내려놓은 체념에 가깝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견고한 것이 이미 주어져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 음성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