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한 가지 사실에 마음이 멎습니다.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이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 한 산 위의 명령이라는 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산에서 열한 제자를 만나, 우리가 흔히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 부르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 익숙한 본문을 천천히 읽으면 무게중심 하나가 또렷이 드러납니다. 가는 일도, 세례도, 가르침도 모두 이 명령에 속해 있지만, 그 전부가 향하는 중심은 단 하나,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28:18-20 (개역한글)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개역한글)
이 명령이 주어진 자리부터 살펴보십시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마태복음 28:16, 개역한글)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자리의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태복음 28:17, 개역한글). 예수님은 확신으로 가득한 사람만 골라 사명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경배와 머뭇거림이 뒤섞인 그 무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지상명령은 완성된 사람들의 업적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주님께 응답하는 사람들의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헬라어가 드러내는 하나의 명령: 제자로 삼으라
한국어 번역으로 읽으면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가 모두 나란한 명령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서 마태복음 28:19-20의 명령형(imperative) 동사는 하나, 마테우사테(μαθητεύσατε, 제자로 삼으라)뿐입니다. 포류텐테스(πορευθέντες, 가서), 밥티존테스(βαπτίζοντες, 세례를 주고), 디다스콘테스(διδάσκοντες, 가르쳐)는 모두 이 본동사에 딸린 분사(participle)입니다.
그렇다고 가서를 빼도 되는 말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같은 짜임, 곧 가서 다음에 명령이 오는 문장을 여러 번 씁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마태복음 2:8, 개역한글)라고 말했고, 무덤의 천사는 여자들에게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마태복음 28:7, 개역한글)라고 명했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가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가지 않으면 알아볼 수도, 전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헬라어 문법학자 대니얼 월리스(Daniel Wallace)와 빌 마운스(Bill Mounce)도 마태복음 28:19의 가서를 이런 부대 상황 분사(attendant circumstance participle)로 보고, 본동사의 명령 의미를 함께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월리스가 덧붙이듯 무게는 본동사에 있습니다. 가기만 하고 제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명령의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의 목표는 어딘가로 떠나는 일 자체도, 결신자의 숫자를 늘리는 일도 아닙니다. 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 그 모양을 보여 줍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 개역한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부르심을 이제 모든 족속에게로 넓히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명령의 근거
예수님은 명령에 앞서 먼저 선언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개역한글). 권세로 옮긴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다스릴 권리와 능력을 뜻하며, 그 범위는 하늘과 땅 전체입니다. 이 선언은 다니엘이 본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자 같은 이에게 하나님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다니엘 7:14, 개역한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안에서도 대조가 선명합니다. 광야에서 마귀는 예수님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9, 개역한글)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름길을 거절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권세를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19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제자 삼는 일의 근거는 우리의 열심이나 말솜씨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이미 주어진 권세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자신 없는 사람이 억지로 떠밀려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의 명령을 따르는 일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넓어진 부르심
이 명령이 미치는 범위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처음 열두 제자를 보내실 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마태복음 10:5, 개역한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뒤에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 넓어짐은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 12:3, 개역한글)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복음 1:1)로 시작한 마태복음은 모든 족속을 향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를 세우는 두 방식
제자 삼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본문은 두 분사로 답합니다. 첫째는 세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그 사람이 이제 삼위 하나님께 속했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표입니다. 바울은 세례의 뜻을 이렇게 풀어 줍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로마서 6:4, 개역한글). 물에 온전히 잠겼다가 올라오는 모습처럼, 세례받은 사람은 옛 삶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에서 더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사도행전 8장)은 이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빌립은 이사야의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사도행전 8:35, 개역한글) 내시는 물을 보자 세례를 청했습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사도행전 8:38, 개역한글)라고 기록합니다. 말씀을 풀어 예수님을 전하는 일과 세례가 한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둘째는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일부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20, 개역한글)고 하십니다. 목표는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치시며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24, 개역한글)라고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세워진 첫 교회도 이 길을 따랐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사도행전 2:41, 개역한글) 공동체에 더해졌고, 이어서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사도행전 2:42, 개역한글). 제자 삼기는 결단의 한 순간으로 끝나는 행사가 아니라, 세례로 시작해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며 함께 자라 가는 평생의 길입니다. 배운 말씀을 순종으로 잇는 일은 마태복음 28:20,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서 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명령을 감싸는 약속
명령은 약속으로 끝납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개역한글). 마태복음은 첫 장에서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소개하며 그 뜻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복음 1:23, 개역한글)로 풀었습니다. 복음서 한가운데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개역한글)고 약속하셨고,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함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의 구조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권세의 선언(마태복음 28:18) → 중심 명령인 제자 삼음과 그 방법인 세례와 가르침(마태복음 28:19-20) → 함께하심의 약속(마태복음 28:20). 의심이 섞여 있던 열한 제자에게 주신 약속은 오늘 머뭇거리는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우리는 혼자 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가십니다. 이 약속은 마태복음 28:20, 항상 함께하시는 예수님에서 깊이 묵상했습니다.
오늘의 적용: 모든 신자에게 주신 명령
지상명령은 선교사나 목회자만의 몫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명령을 평범한 열한 제자에게 맡기셨고, 그들이 가르쳐 지키게 할 모든 것 안에는 이 명령 자체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삼기는 교회의 특별 행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상입니다.
그 일상의 무대는 가까운 곳에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1:8은 복음이 퍼져 갈 길을 이렇게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개역한글). 가정과 일터에서 시작해 익숙한 이웃, 마음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다른 문화권까지 이어집니다(사도행전 1:8 묵상). 이번 주에 시작할 수 있는 세 걸음을 제안합니다.
- 한 사람의 이름을 정해 기도하기. 가족, 동료, 이웃 가운데 한 사람을 정해 날마다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 말씀을 함께 읽고 지킬 것 하나 찾기. 마태복음의 한 단락을 함께 읽고, 이번 주에 순종할 한 가지를 서로 나눕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은 이렇게 작게 시작됩니다.
- 세례와 교회 공동체로 이어 주기.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이 있다면 세례와 교회의 가르침과 교제로 이어지도록 곁에서 함께합니다.
가서, 제자 삼는 교회: 발자취들
교회 역사는 이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져 왔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는 1793년 인도로 건너가 여러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평생을 바쳤습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IM)를 세우고, 중국인의 옷차림과 생활 방식을 따르며 내륙 깊숙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흐름은 한국 교회로도 이어졌습니다. 1907년 조직된 첫 독노회는 그해 안수받은 첫 한국인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기풍을 제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했고, 그는 1908년 제주에 도착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국선교연구원(KRIM)이 발표한 2024년 말 기준 통계에 따르면 한국 국적 장기 선교사 21,621명이 한국을 제외한 170개국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한 산 위에서 열한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 이천 년을 건너 이렇게 자라났습니다.
기도와 헌신으로의 초청
지상명령은 무거운 짐이기 전에 은혜로운 부르심입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명령하셨고, 그 명령을 따르는 사람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무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늘 곁에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 그에게 진실한 관심으로 다가가는 것, 함께 성경을 펴는 것, 그 작은 순종이 제자 삼기의 첫걸음입니다.
주님, 의심이 섞인 마음으로 서 있는 저에게도 다가와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의지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한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일에 저를 써 주소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오늘 한 걸음 내딛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고 자료
- YouVersion — 마태복음 28장 (개역한글)
- Bible Hub — Matthew 28:19 Greek Lexicon
- Bible Hub — μαθητεύω (mathēteuō, Strong’s 3100)
- Daniel B. Wallace — The Great Commission or the Great Suggestion?
- Daniel B. Wallace — The Great Commission, Part 2: Historical Setting
- Bill Mounce — Great Commission and Participles
- 한국선교연구원(KRIM) — 2024 한국 선교 현황(2024년말 기준)
- 주간기독신문 — 낙도로 간 선교사들 (6) 한국 최초의 선교사 이기풍 제주도로 가다